글. 김민주 사진. 이정수
미술품 수집가 인영(忍迎) 문웅 박사는 50여 년간 방대한 미술품을 수집해온 우리나라 대표 아트 컬렉터다. 한번 손에 들어온 작품은 절대 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오직 ‘작품 감상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우리나라 미술 컬렉터계의 한 획을 그은 문웅 박사를 만나 미술수집 인생과 컬렉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미술품 수집, 심미안과 교양을 갖추는 일
인생은 늘 계획대로 펼쳐지지 않는다. 때로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살다 보면 꿈꿔 왔던 삶보다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인생이 펼쳐질 수 있다. ‘Became(되다)’이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는 문웅 박사는 이 단어의 뜻처럼 계획한 대로 산 인생은 아니지만, 뜻하지 않게 감사한 일들이 펼쳐졌고 운명처럼 만난 ‘예술’은 삶의 분기점이 되어주었다고 말했다.
문웅 박사가 본격적으로 미술품을 가까이하게 된 것은 서예를 배우면서부터다. 이후 국전 초대작가이자 서예가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예술에도 관심이 생기다 보니 마침내 미술품까지 수집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미술관을 경영하고 싶은 꿈이 생겨 예술경영을 공부하였고, 내친김에 성균관대학교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또 최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소장품을 수집한 전시 <저 붉은 색깔이 변하기 전에>를 개최하여 팬데믹 사태로 얼어붙은 미술 시장을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 전시를 통해 제가 가진 3,000 여 미술품 중 120여 점을 전시하였습니다. 내 손 안에 들어온 미술품은 단 한 점도 팔지도 주지도 않다 보니 이렇게 많은 미술품을 수집할 수 있게 되었고, 끝내 전시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삶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림 몇 점을 팔면 해결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내의 협조를 얻어 미술품이 아니라 집을 팔기도 했었습니다.(웃음) 어떤 사람은 미술품이야말로 마지막 럭셔리라고 하더군요. 좋은 미술가의 작품은 내 집에 오는 손님에게 내가 한 수 앞서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도 하니까요. 이처럼 미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그저 돈을 가졌다는 것으로만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귀한 것, 심미안과 교양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신진작가에게 큰 보탬이 되는 컬렉터 되고파
문웅 박사는 18년째 ‘인영미술상’을 운영하며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후원하고 있다. 그의 후원은 이제 막 작가생활을 시작한 예술인에게 물감이나 캔버스를 살 돈이 되고, 자극제이자 삶의 원동력이 되어준다. 이에 따라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작품은 주로 작가 개인과의 교류에 의해서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국제 아트페어나 옥션에서 구입한 작품 또한 많다. “박수근 선생이 가난했던 시절 미군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때 박수근 선생은 자신의 그림을 꾸준히 사 왔던 존릭스라는 분에게 그림 석 점을 선물하였고 그중 하나가 <빨래터>이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죠. 저에게도 큰 교훈이 되는 일입니다.”
3,000여 미술품 중 가장 소중한 미술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문웅 박사는 “절대 하나만을 꼽을 수 없다”라며 단언했다. 미술품 한 점 한 점을 살 때마다 늘 신중을 기했고, 모든 작품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물론 김환기, 이중섭, 천경자 추사 등의 작품, 이대원 선생의 유화,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노존본-最古本> 등을 수집한 것은 그의 수집 인생에서 역사적인 일이다.
“자식 많은 부모에게 어느 자식이 가장 예쁘냐고 물어보면 한 명만을 꼽을 수 있을까요? 아마 다른 자식이 서운해하겠죠. 이처럼 만약 내가 몇 점을 예로 든다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작가가 알면 서운해할 것이에요.(웃음) 세종문화회관에서 인영문웅컬렉션전이 열렸을 때도 몇몇 작가가 내게 ‘수천 점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계시는데 왜 내 작품은 한 점도 안 사주시냐’고 볼멘소리를 하시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다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생산적인 취미,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줄 것
최근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 붐이 불면서 아트테크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좋은 미술품에 투자를 하면 가치가 상승하고 세금도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모든 투자가 그렇듯 무분별한 투자는 위험할 수밖에 없다. 문웅 박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려를 내비치며 “미술품 수집은 천박한 투자가 아닌, 진정으로 미술품을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간송미술관 설립자이신 전형필 선생, 삼성을 창업하신 이병철 회장, 스페인 구겐하임 미술관에 작품을 대여해 주고 있는 페기 구겐하임 여사를 예로 들며 미술품 수집은 이 분야에 공부를 하고 미술을 사랑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1727년에 태어난 석농 김광국의 <석농화원>이라는 글을 보면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깊이 있게 보게 되고, 그리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과는 다르다’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작품을 구입할 때마다 그에 대한 공부를 하고 몇 번을 보고 자문을 구한 뒤에 작품을 내 손안으로 들여옵니다.”
아울러 문웅 박사와 그의 가족들은 소모재와 생산재를 뚜렷이 구분한다고 설명했다. 가령 좋은 작품을 사면 그 작품의 값은 계속 오르지만, 공산품은 사는 즉시 중고가 되어 감가상각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웅 박사는 결혼 당시 60만 원 어치 다이아몬드 반지를 구입하는 대신 오지호 작가의 ‘해경' 작품을 사서 아내에게 결혼 선물로 줬다고 했다. 현재 그 작품의 가치는 수천만 원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그는 결혼기념일, 자녀의 생일, 집안의 경사가 생기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어김없이 미술품을 구입한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면 예상치 못한 행운이 따르기도 한다. 문웅 박사는 인생의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많은 중년 분들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좋은 취미를 갖자’고 강조했다. 좋은 취미는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할 수 있으며, 단순히 소비적인 것이 아닌 생산적인 분야의 취미라면 인생의 다시없을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관심을 가져왔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여겨지면 이제는 몰입의 시간을 가져보자. 평생 미술품과 사랑에 빠진 문웅 박사처럼, 우리도 무언가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