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38년의 공기업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했다. 은퇴 후에는 따뜻하고 여유롭게 쉬엄쉬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딸의 결혼 자금, 로스쿨에 진학하려는 아들 뒷바라지 등 가족 부양의 책임이 그를 다시 일터로 내몰았다.
글. 한국은퇴설계연구소 권도형 대표
고되거나 무료하거나
아파트, 빌딩, 버스터미널을 전전하며 경비원, 주차관리원, 청소부, 배차원 등의 시급 일자리에서 팍팍한 노동 현장을 견뎌야 했다. 급기야는 일하다 쓰러졌고 해고되었다. 7개월의 투병 생활을 마치고도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처지였다. 그는 자신과 똑같은 운명을 지닌 이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가 거쳐 간 이른바 낮고 천한 일터의 70% 이상을 은퇴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된 노동의 일상을 담담히 기록하였고, <임계장 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임계장’은 임시-계약직-노인장에서 한 자씩 딴 자조 섞인 조어이다. 그의 책은 한국 노인 노동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료이다. 공기업 정규직 출신 퇴직자 조정진 씨의 이야기이다. 그는 지금도 삶을 꾸려가기 위해 고된 일터를 지키는 중이다.
임계장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도 있다. 정년퇴직 후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는 그는 아내가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떠나자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무료함에 빠진다. 그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옛 직장동료를 만난다. 두 사람은 직장에 대한 향수를 견딜 수 없어졌고, 의기투합한다. 동네 다방을 근거지 삼아 회사놀이를 시작한다.
이들의 사업은 가짜다. 그렇지만 놀이의 실감을 높이기 위해 신입사원을 뽑기로 했다. 전국에서 물밀 듯이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면접을 보면 지원자가 줄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다방 안은 회사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가득 찼다. 직책을 만들어 보고와 회의를 하고 놀이용 가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가상의 재무제표까지 작성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회사놀이는 전국으로 번져 걷잡을 수없이 커진다.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일본 소설 <극락컴퍼니>의 줄거리를 옮겨보았다. 소설 주인공이 만든 놀이용 회사 이름이 극락컴퍼니다. 직장을 극락과 연결한 발상이 흥미롭다. 유머러스한 이 소설은 일본 퇴직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퇴직 후 무료와 자존감 상실에 빠져 직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은퇴자와 일
상담과 교육을 하면서 만난 은퇴자들의 대부분은 임계장과 극락컴퍼니 중 하나였다. 생계를 위해 원하지 않는 고된 일을 하거나, 무료함과 상실감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적어도 일에 관한 한 한국 은퇴자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은퇴 커리어 설계’ 같은 단어는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절망할 수는 없다.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다.
임계장과 극락컴퍼니는 종합적인 측면의 은퇴설계를 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퇴직 전에는 은퇴 후 쉬는 것을 너무나 쉽고 자연스러운 일로 여긴다. 이것은 큰 착각이다.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는 게 보통 사람의 형편이다. 돈 걱정 없이 쉴 수 있다 하더라도 매일 쉬는 게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인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은퇴 후에도 일을 갖는 게 좋은가? 모두에게 통용되는 답은 없다. 그렇지만 대체로는 은퇴 후에도 일이 있는 게 바람직하다. 경제적으로 효과적이다. 하루 4시간씩 주 5일 근무하고 주휴수당까지 챙기면 최저임금으로 월 90만 원 정도다. 이자나 월세로 이 정도 수익을 내려면 3억 원은 있어야 한다. 한나절 일자리가 3억 자산과 맞먹는 셈이다. 신체적·정서적 건강을 위해서도 일을 갖는 게 더 좋다. 자아실현이나 인생의 의미, 인류 봉사 같은 높은 경지로 들어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도 없다.
은퇴자에게 적합한 일은 무엇일까? 자주 받는 질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일과 생활의 경륜을 발휘해 다른 사람을 이끌고 조언하는 직종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은퇴자가 이런 일자리를 차지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낙타가 바늘귀를 드나드는 것만큼 어렵다. 높이 바라보지 말고 최악을 피하는 게 우선이다. 비자발적으로 임계장이 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노예로 전락하는 불운만은 기필코 막아야 한다. 미리 은퇴 재무 설계와 직업 준비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무 비관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은퇴설계 전문가로서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희망적인 교훈을 하나 언급하겠다. 창업이든 재취업이든 은퇴 후의 일을 고를 때는 진입장벽이 높을수록 좋다. 2~3개월 학원에 다니면 익힐 수 있는 일이라면 보수와 대우가 박하다. 그 대신 1년 이상 힘들여 숙달해야 하는 일이라면 전망이 밝아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 2년, 3년, 5년으로 기간이 늘어난다면 더욱 경쟁력이 강해진다.
따라서 충분한 준비 시간을 갖는 게 은퇴 후 직업을 설계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퇴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미리부터 제2의 직업을 준비를 시작하라. 시간이 부족하다고 조급할 필요는 없다. 미래 소득을 위한 필수 투자라 생각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인내하라. 가능한 한 진입장벽이 높은 곳을 선택하라. 효과적으로 준비를 통해 임계장이나 극락컴퍼니가 아니라 즐겁고 자발적으로 일을 즐기게 되기를 바란다.